마태복음 11장: 하나님께 이르는 길


1. 1-15절: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열두 제자에 대한 훈련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동안에는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 때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3절)라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분” 즉 메시아는 심판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가 듣는 소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물은 것입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지.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5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온전해짐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대답은 당신이 오실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하시면서 예수님은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6절)고 하십니다. 자신의 기준 혹은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대하면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면 의문과 회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틀과 사고와 기대를 넘어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7-15절). 그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모든 예언자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통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은총을 입은 사람은 세례 요한보다 더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12절). 이 구절은 새번역보다 개역개정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도 그런 까닭이고, 그런 까닭에 예수님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느리고 부드럽고 조용히 역사하기에 인간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깁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 “느리고 은밀한 힘”을 의지합니다.



2. 16-24절: 눈 먼 세대에 대한 애가

예수님은 초점을 바꾸시어 세례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면서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18절). 반면, 예수님이 금식하는 모습을 숨긴 채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자 사람들은 그를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합니다. 도무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회개할 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생각났습니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형성되었던 중요한 동네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기는 할망정 회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볼 눈이 없었고 들을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운명을 생각하며 탄식하십니다.


3. 25-30절: 감사 기도와 초청

회개할 줄 모르는 교만한 세대를 두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한 가지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25절)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두쪽 나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같은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무시 당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아무 존재감 없던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25-26절).

감사 기도 중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다.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신을 향해 더듬어 가려 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27절).

예수님은 이러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 몸부림 쳐 온 사람들에게 초청하십니다. 그렇게 몸부림 쳤지만 하나님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영혼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28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이를 길을 모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 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분의 은총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짐을 내려 놓고 쉼을 얻습니다. 그분 안에서 새로이 지게 되는 “멍에와 짐”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입기 위해 지는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기에 기쁨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묵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과 틀과 사고에 맞추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내가 중심이고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에 대해 의문에 빠지고 그 의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축소시키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틀로도 담을 수 없고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차이는 백만광년보다 더 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열고 늘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경이감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위로와 안식과 만족이 있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 앞에 이르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그 품에서 얻은 힘으로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짊어집니다.

복 되어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이! 그 품에서 위로와 안식과 만족을 발견한 이! 그 힘으로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짊어지고 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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